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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세계 is unavailable, but you can change that!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시 82:1).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누구일까? 또 그들이 하나님의 결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왕상 22:19–23)? 뱀이 하와에게 말했을 때 하와는 왜 놀라지 않았을까? 야곱의 기도에서 여호와와 그분의 천사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창 48:15–16)? 네피림의 후손(창 6:4)은 어떻게 홍수에서 살아남았을까(민 13:33)? 결박된 영혼들에 대한 베드로와 유다의 믿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벧후 2:4; 유 6)? 바울은 왜 악을 지리적 통치권(보좌, 정사, 통치자, 권위)의 측면에서 묘사하는 것일까? 천사들도 감히 꾸짖지 않는 “영광스러운 자들”은 누구일까(벧후 2:10–11)? ...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은사주의자가 아닌 우리 대다수는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그런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진 않는다. 친구의 열띤 이야기를 고개를 끄덕이며 점잖게 듣는 척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그런 것을 설명해 줄 만한 다른 논리들을 궁리할 것이다. 우리 현대인에게는 무슨 일에든 증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종류의 체험이 실은 사건을 감정적으로 그릇 해석한 탓이라고 여기거나 심지어 적절한 약물로 치료해야 할 병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둘 다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다. 현대 복음주의의 하위문화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체험들을 신학에서 ‘배제’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훈련받았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신학은 이런 체험을 중시하지 않는다. 나의 주장은 이렇다. 만일 우리의 신학이 정말로 성경 본문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반드시 우리의 선택적인 초자연주의를 재검토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성경의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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